영화 맨홀(Hideaway)│2025
감독 : 한지수 │ 주연 : 김준호, 권소현, 민서, 박미현
영화 맨홀(Hideaway)│2025
감독 : 한지수 │ 주연 : 김준호, 권소현, 민서, 박미현
▲ 영화 <맨홀> 포스터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맨홀>은 문학의 절절한 언어를 정제된 영상으로 구현해낸 좋은 예다. 원작이 주인공의 독백으로 폭력의 실체와 그 회복불가능한 흔적을 파고들었다면, 영화는 침묵과 시선, 공간으로 주인공의 다층적 심리상태를 전달한다.
▲ 영화 <맨홀> 스틸컷
영화는 오랫동안 자취 생활을 하던 누나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선오’(김준호)는 누나를 반기지만 이내 아버지에 대한 누나의 태도에 반감을 드러낸다. 영화는 선오가 불길 속에서 사람을 구하다 죽은 아버지를 왜 그토록 증오하는가라는 궁금증을 천천히 끌어올리면서 전개된다. 주변 사람들과 미디어에서는 순직한 아버지를 영웅으로 추앙해도 사실 선오에게 아버지는 가정 폭력의 가해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간도 흘렀고,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엄마나 누나와 달리 선오는 더 큰 증오심으로 아버지를 부정하며 살아간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아버지 때문에 이미 다 망가져버렸다는 듯이.
▲ 영화 <맨홀> 스틸컷
그 무렵, 선오는 우연히 만난 한 무리의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고, 상처를 감춘 채 조용히 살아가던 선오의 삶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자친구 ‘희주’(민서)도 만나고, 오토바이도 얻어타면서 선오는 모처럼 행복한 한 때를 보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동네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몇 번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폭력의 트라우마가 외재화되기 시작하고, 급기야 선오가 보복성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선오가 망설이는 동안 아이들은 가해자가 확실하다며 선오 앞에 외국인 노동자를 한 명 붙잡아온다. 그리고 선오에게 다시 폭력으로 응징할 것을 종용한다.
▲ 영화 <맨홀> 스틸컷
영화에서 선오는 세 번 정도 크게 갈등하는데, 이 신에서 처음으로 깊은 고뇌의 눈빛을 보여준다. 폭력을 썼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조차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이 그와 똑같이 폭력을 휘둘러도 될 것인가. 내가 먼저 폭행을 당했다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되갚아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짧은 순간 선오의 얼굴에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많은 질문들이 생생하게 스쳐간다. 그러나 그 틈을 타 묶여 있던 외국인이 탈출을 감행하자 아이들이 전부 그에게 달려들어 무차별로 폭행하게 되고, 그는 결국 숨을 거둔다. 아이들은 시체를 선오의 비밀 아지트인 ‘맨홀’에 유기한다. 그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피해왔던 공간이 자신의 폭력으로 오염되는 순간, 화면에 보이는 것은 맨홀 바닥에 있던 아버지의 사진이다. 영화 <맨홀>은 이처럼 직관적인 방식으로 인생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면서 구멍이라는 메타포를 물리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소설 속 ‘구멍’은 존재의 결핍과 폭력의 흔적을 상징했지만, 영화에서 ‘맨홀’은 그보다 현실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깊고 어두운 공간을 통해 청춘의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위험과 두려움에 대해 묻는다. 비단 폭력만도 아니고 우발적 사고만도 아닌 그 암울한 구멍에서 청춘들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어른들은 그 구멍을 메워줘야 할까 아니면 그 안에 함께 들어가줘야 할까.
▲ 영화 <맨홀> 스틸컷
자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선오의 갈등은 첫 번째 갈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수를 택하고 재판정에 선다. 그러나 혼자만 비싼 변호사를 대동한 이 재판에서 그는 또 한 번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그래서 <맨홀>은 보통의 성장담이 아니다. 대신 성장의 불가능성, 혹은 구멍을 인정하는 데서 기대할 수 있는 윤리적 성숙을 이야기한다. 명확한 구원이나 회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맨홀>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여백과 침묵, 절제를 선택한 한지수 감독의 연출과 배우 김준호의 내면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 영화 <맨홀>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