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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 산책] 김보미의 '세탁선'을 만나다
2020-07-15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미지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 김보미 작가

세탁선 (바토 라부아르 Le Bateau-Lavoir)


에펠탑, 센 강, 루브르 박물관... 파리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명소들이지만 이곳이 빠지면 섭섭하죠. 바로 예술가들의 거리 '몽마르트르'.

그 '몽마르트르'의 라 비앙가 13번지에 20세기의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킨 낡은 목조 건물이 한 채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세탁선 (바토 라부아르 Le Bateau-Lavoir)'. 건물의 모습이 센 강을 오가던 낡은 세탁선을 닮았다고 해서 시인 막스 자코브가 이름을 붙인 '세탁선'은 20세기 초반 당시 파리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아틀리에'였습니다. 이곳에서 피카소의 그 유명한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탄생을 했고, 모딜리아니, 앙리 마티스, 장 콕토 등이 예술혼을 뜨겁게 불태웠지요.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도 파리의 몽마르트르 처럼 내일의 피카소를 꿈꾸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동네가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이곳 상암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연남동이 바로 그곳인데요. 그곳에 가면 YTN 아트스퀘어가 초대한 7월의 화가 김보미의 '세탁선'이 있답니다. 그럼 김보미의 '세탁선'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아담한 작업실 풍경


구불구불 이어진 연남동의 어느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지어진 지 꽤나 오래돼 보이는 아담한 연립주택이 나옵니다. 반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자 작가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낡은 이젤과 그 위에 얹혀있는 캔버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옆으로 순백의 커튼이 펼쳐진 작은 창문 아래 색색의 연필과 물감들, 굵고 가는 붓,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병들과 그림 도구들이 가득합니다. 젊은 나이에 화단이 주목하는 작가로 떠오른 화가의 특별한 상상이 펼쳐지는 내밀한 공간, 좁지만 무한한 '우주'가 펼쳐지는 김보미의 '세탁선'에 올라타니 궁금한 것들이 참 많아지네요.


꼼꼼하게 붓칠을 하는 김보미 (사진 _ 장현근 에코락 갤러리 대표)


Q. 작품을 보면 독특한 마티이르가 인상적인데 이런 스타일이 탄생된 계기는?


미술대학에 다닐 때는 주로 유화물감을 사용했어요. 유화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과 기법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실험적인 그림들을 그렸었죠. 나이프를 이용해 캔버스에 물감을 올려 두껍게 색을 바르기 시작했는데 마치 인상파나 독일 표현주의 그림 같았어요. 색이 칠해지면서 나타나는 우연성과 강렬한 색채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일렁임을 좋아했죠. 그런데 유성물감과 저렴한 기름에 오랫동안 노출된 탓에 건강에 문제가 생겨 휴학을 하게 됐고, 그 뒤로 일 년간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복학을 하고 나서 아크릴로 재료를 바꾸게 됐는데 유화와 달리 아크릴은 나이프를 사용해도 두텁고 날렵한 표현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물감을 바르기 전에 밑 작업을 하고 나이프로 모델링 페이스트로 자국을 낸 뒤 그 표면 위에 물감을 바르게 됐죠. 그러다 보니 색도 정돈되고 지금처럼 목판화 느낌의 스타일이 나오게 됐죠.

Q. 형형색색의 꽃과 군상들이 작품 속에 자주 등장을 하는데 특별한 사연이라도?


소재나 배경, 구체적인 구성 요소를 선택하는 방법에 몇 가지 저만의 규칙이 있어요.


첫째. '낯설게 하기'. 익숙한 장면을 살짝 비틀어서 낯설게 만드는 거죠. 엉뚱한 상황에 소재와 배경을 놓거나 익숙한 색을 낯설게 바꾸고 형태나 크기도 바꿔보는 거예요.


둘째. '치열한 인상'. 살아오면서 느낀 세상의 인상이 대부분 치열하고 복잡하지만 한편으로는 태연한 듯 보이더군요.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자연물이나 인물 군상을 화면 가득 채우고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는 등 화면 구성에 정성을 많이 쏟아요. 그림 속에 종종 등장하는 당혹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의문을 던지는 듯하면서도 태연한 척 시크해 보이는 사춘기 소녀는 바로 제 모습이기도 해요.


셋째. '미적인 고려'. 그림은 장식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첫인상을 좋게 가져야 마음을 열게 되고 감상자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Q. 작품 속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거나 수근수근 속삭이는 것처럼 보여지는데 그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평안과 휴식을 주는 그림도 있지만 저는 감상자를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마치 비누처럼 말이죠. 비누는 다른 말로 계면활성제라고 하는데 손에 묻은 얼룩을 분리하듯이 그 경계가 되는 지점을 활성화시키는 거죠. 제 그림들이 정서적, 정신적 경계의 활성화를 유발해 감상자들이 일상에서 고민해 보지 못한 부분을 잠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래요. 그리고 창문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하고 싶거든요.


The Party, 145.5 X 112.1cm, Acrylic on Canvas, 2020


Q. 자라온 환경과 성장 과정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공동체 문화와 유교 문화가 뿌리를 내린 작고 보수적인 소도시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저는 성격상 그런 풍토 속에서 쉽게 동화되지 못했고 대충 넘어간다거나 그러지도 못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각이나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해봤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그림에 빠지게 됐지요. 그림 속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마음껏 저의 생각들을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웠기 때문이죠.


Q.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고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특별하고 기막힌 그림들을 그리고 싶지만 캔버스 앞에 앉을 때마다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와 영감이 떠오르는 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없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김보미라고 하는 화가가 갖고 있는 프리즘을 통해 이미지가 표현될 때 기법적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과 표현의 방식, 감상자와의 소통 방식이 독창성을 갖게 되길 바래요. 그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작가, 무엇보다도 꾸준히 활동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