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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토리] 기자가 007이 될 수 있을까
2021-10-13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감독 : 캐리 후쿠나가, 출연 : 다니엘 크레이그, 라미 말렉, 라샤나 린치, 레아 세이두 등)

▲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포스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이렇게 슈퍼 히어로물, 영웅담 얘기가 많았었나 싶다. 꼭 그렇지는 않았던 거 같다.

인류의 영웅이 꼭 초인간적인 존재들은 아니었으니까. 슈퍼맨이나 배트맨, 심지어 요즘 인기인 블랙 위도우 등도 어쩌면 그냥 만화의 산물이었으니까.


007도 그랬다. 데이빗 니븐으로 시작해(이 배우를 기억하는 기자들이 있을까?) 숀 코넬리와 조지 라젠비(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007 영화 '여왕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딱 한편에 나왔던 배우로 이 영화는 그래서 소수 마니아들이 지지하는 컬트가 됐다), 로저 무어, 그리고 티모시 달튼과 피어스 브로스넌까지는 대체로 反共 이데올로기의 전사들이었다.

심지어 피어스 브로스넌은 '007 어나더데이(Die Another Day)'에서 북한에 침투까지 하는데 세상에나 세상에나, 북한 농촌에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나 볼 법한 물소가 나와서 기겁을 하게 만들었다. 007 영화가 그만큼 아시아에 대해 무지했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아시아 시장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컷 (다니엘 크레이그)


007이 바뀐 것은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고 나서부터이다. 정확하게는 샘 멘더스가 메가폰을 잡은 후이다.

'스카이폴'과 '스펙터'는 007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가공할 테러 조직, 광기의 음모 조직, 혹은 내부의 적과 싸우는 의지의 인간 – 슈퍼 히어로가 아닌 인물로 바뀌었다. 그래서 보다 인간적이고, 그의 행동 동기에 합리성이 부가되었으며, 무엇보다 본드가 사랑을 하는 로맨틱 가이로 등장한다. 007은 이제 적어도, 어떻게든, 세상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정의의 인물로 승화됐고 그게 다니엘 크레이그가 맡은 ‘007 시리즈’ 후반의 주된 기조(基調)가 됐다.



▲ 영화 '007 스카이폴' 포스터(좌), 영화 '007 스펙터' 포스터(우)


돌이켜 보면 세상의 정의를 떠안는 영화의 캐릭터는 상당 부분 신문이나 방송 기자였다. 혹은 검사나 판사였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을 맡았던 '대통령의 사람들'은 미국의 대표 일간지 중 하나인 워싱턴포스트 기자 밥 우즈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활약상을 그린다. 두 사람은 닉슨의 부패와 불의에 맞서 워터게이트의 진상을 파헤친다.

폴 뉴먼 주연의 '폴 뉴먼의 심판'은 법조 카르텔에 맞서 법의 정의와 심판을 회복하려는 한 늙은 변호사의 얘기다. 이제 이런 얘기들은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기자와 검사, 변호사의 역할이 큰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첩보기관 요원의 활약은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법이고 일반인들이라면 인식하기 힘든 일이다. 사회에서 흔히들 얘기하는 정의의 수호자들은 기자와 검사, 판사, 의사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들 집단은 이미 희화화된 지 오래다. 딸의 결혼 상대로, 사위 후보감으로 기자와 검사는 절대 안 된다는 얘기가 나돈 지 꽤 오래고 심지어 요즘엔 비난을 넘어 비하하는 호칭으로 불린다.

▲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컷


기자들에게 007처럼 되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특종에 눈이 멀어 거짓을 사실로 만드는 일에 스스로 동참하거나 최소한 그런 악행에 엮이는 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니 어떻게 한 언론사의 법조 기자가 1조 원에 가까운 부동산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가? 이 언론의 민낯을 어찌해야 하는 일인가. 007을 도와 사회정의와 인류평화를 위해 애써도 될까 말까 한 세상에서 오히려 007이 응징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일 아닐까? 아무리 영화 속 인물이라도, 007은 세상을 구하려고 애를 쓴다. 그것도 온몸이 부서져라. 007 영화를 단순히 첩보 액션 영화라고 치부하면 안 될 일이다. 이 영화 안에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제임스 본드의 상사인 MI6의 말로리(M) 국장은 말한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생존과 밥벌이, 실존과 명분, 그 사이에서 기자의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화 007이 주는 교훈이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007 No Time To Die)’ 안 보면 후회한다. 걸작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카지노 로얄', '스카이 폴', '스펙터'를 미리 좀 봐야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다니엘 크레이그 판 007의 총정리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 평론가 오동진 (YTN 기자 출신,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BIFF 아시아필름마켓 공동위원장, 라이브 더빙쇼 <이국정원>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