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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토리] 아시아계 혐오 범죄와 디아스포라 저널리즘
2022-06-08

■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아시아계 혐오 범죄와 디아스포라 저널리즘


영화 '보더타운'│2007

감독 : 그레고리 나바, 주연 : 제니퍼 로페즈, 안토니오 반데라스

▲ 영화 <보더타운> 포스터


하룻밤 사이 젊은 여성들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여성들 중에는 미성년자도 있다. 연쇄 살인의 의혹이 강했다. 그런데 그 사라진 여성의 숫자는 한두 명도, 10~20명 정도가 아니었다. 무려 5,000명에 이른다. 하지만 경찰은 수년째 수사를 하지 않는다. 희생자 대부분이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24시간 불빛이 꺼지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쉼 없이 일했는데 일하는 작업장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출퇴근 길에 살해를 당했다. 특히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 취약 시간대였다. 희생자는 해마다 300여 명이기 때문에 거의 매일 여성들이 살해당한 셈이다. 싼 임금에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도구화되고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책임지는 이들은 전혀 없었다. 경찰은 범인을 잡았고, 나머지는 가족 폭력 문제라고 규정한다. 회사조차 어떤 조처하지 않으며 정부도 방관한다. 절대 다수 언론은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어쩌다 보도한 하나의 신문은 배포 금지되는가 하면 가판대에 깔리자마자 경찰이 강제 수거한다.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에 인접한 멕시코의 국경도시 후레아스 연쇄 살인 사건 실화를 다룬 영화 ‘보더 타운(2007)’은 이 기묘한 상황을 파고든다.


▲ 영화 <보더타운> 스틸컷


야간 퇴근길에 공장 노동자 에바는 통근 버스 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사막에 매장당한다. 천행으로 다행히 가까스로 살아 지옥에서 탈출한다. 에바는 이 같은 진실이 알려지고 세상이 바로잡히기를 바랐다. 시카고 신문사의 기자 로렌(제니퍼 로페즈 분)은 해외특파원 자리를 약속받고 멕시코 후아레스의 연쇄 살인사건을 심층 취재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한다. 하지만 애초에 로렌은 멕시코의 연쇄 살인 사건을 취재할 생각이 없었다.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로렌도 멕시코 출신의 이주민 가정 태생이었다. 친부모도 멕시코인 이주노동자였고 농장에서 일하던 중 살해당했다. 그러한 아픈 트라우마가 있으므로 다시는 멕시코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영화 <보더타운> 스틸컷


오로지 성공만을 향해 달려온 로렌은 일단 파견되었기 때문에 심층 기사를 쓰려는데 고군분투하게 된다. 현지의 지역 신문 편집장이자 예전 동료였던 디아즈(안토니오 반데라스 분)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심지어 공장 노동자로 잠입해서 취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잠입 취재가 가능했던 것은 에바가 그 상황을 상세하게 전했기 때문이다. 우선 에바를 폭행 살해하려 한 운전기사를 잡아야 했다. 역시 야간 근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로렌을 버스 운전기사가 성폭행하려 했다. 그것은 이미 죽음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에바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탈출한 로렌은 운전기사를 경찰에 고발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용의자를 잡으면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용의자는 새 발의 피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살인 집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실은 놀라웠다. 자유무역협정(FTA)이 근본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언뜻 이해가 안 될 일이었다. 자유무역협정(FTA)과 소녀들의 연쇄 살인 사건이 어떻게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 관련성은 로렌의 기사가 보도되는 지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로렌은 자신의 경험과 현장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완성하고 본사로 송고한다. 드디어 각고의 노력 끝에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억지로 멕시코에 보낸 편집 국장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동료 기자가 로렌에 연락해 온다. 본사로 오지 않으면 기사가 영원히 빛을 못 볼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급히 미국 본사에 비행기로 도착한 로렌은 편집 국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놀랍게도 그 사무실에는 미 의회 의원이 있었다. 로렌의 기사를 막기 위해 직접 신문사에 찾아왔던 것이다.


▲ 영화 <보더타운> 스틸컷


미국의 기업들은 자유무역협정에 따라 관세 혜택으로 멕시코 후아레스에서 싼 노동력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저임금 공여로 막대한 이익이 자본과 기업에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곳에서 소녀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업은 밝히기 꺼렸던 것이다. 멕시코 정부는 자국 여성이 수천 명 살해되는데도 공식적으로 인정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거꾸로 기업은 치안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인권 국가 운운하는 미국의 정치인들도 외면했다. 이렇게 되니 온갖 범죄자들이 후아레스 지역에 몰려들었다. 강간과 살해를 마음껏 해도 누구도 수사하거나 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에 대해서 현지 저널리스트 디아즈(안토니오 반데라스 분)는 후아레스에는 불이 나도 불을 끌 소방서도 없고 불을 끌 물도 없다고 성토한다. 이렇게 말한 디아즈는 괴한이 발사한 총탄 사례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만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에서는 재개 인물이 정관계를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 영화를 보면 결국 국가 간 초국적 자본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확인해 준다. 로렌은 디아즈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작은 지역 신문사를 직접 운영하고 취재를 이어간다.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영화는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진행 중으로 마무리된다.


▲ 영화 <보더타운> 스틸컷


만약 로렌이 멕시코 이민자 출신의 저널리스트 출신이 아니었다면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로렌도 처음에는 여성들이 수없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되고 싶었던 로렌에게는 거악의 현실 앞에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디아스포라 저널리스트가 모두 로렌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하지만 로렌은 자신의 부모가 살해당하고 자신의 처지가 불우하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 외면과 무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각성하게 된다. 이는 우리 모두, 디아스포라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세계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 영화 <보더타운> 스틸컷


이런 멕시코의 현실은 먼 나라, 다른 민족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단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현실이 녹록지 않다. 여전히 흑인보다 이중 차별을 받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심해졌다. 그러한 혐오 범죄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아시아계 사람들이 침해한다는 편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탄소년단이 백악관에 초청돼 아시아계 혐오 범죄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만큼 아시아인에 대한 범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현지 시민단체의 분석에 따르면 2020년 3월 이후 지금까지 1만 9백여 건의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탄소년단은 지난해 3월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에서 한인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에 위로와 각성을 촉구한 바 있다. 그 총기 사건이 아시아 혐오 범죄로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탄소년단은 일종의 저널리즘 활동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한인의 현실에 주목하는 것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 한인들이 많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래에 다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우리는 다시 한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 저널리즘이 아시아 범죄, 특히 한인에 대한 범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보더 타운’의 로렌과 같은 한인 저널리스트들이 한국의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세계에 여론을 형성해 주길 바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