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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토리] 아이를 누가 원망하게 하는가. - 영화 ‘앵커(2022)’ 리뷰 (※스포일러 주의)
2022-07-05

■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아이를 누가 원망하게 하는가.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앵커'│2022

감독 : 정지연, 주연 : 천우희, 신하균, 이혜영

▲ 영화 <앵커> 포스터


당장 드러나는 장면들은 앵커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각각 욕망의 충돌로 보인다. 그런 설정이야 영화에서 흔하고 그래서 식상하기까지 하다. 누구나 앵커에 대한 욕망은 갈등의 모순을 숨기고, 꿈으로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다. 결국, 꿈으로 포장된 욕망을 충족한 사람은 물론 이루지 못한 사람도 그것에 집착하게 되고,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 병이 들어간다. 그렇게 병들어가는 과정에는 이를 악화 시키는 방송 시스템의 모순도 작용하고 있다.


▲ 영화 <앵커> 스틸컷


YBC 9시 간판 앵커 정세라(천우희 役)는 생방송 전에 우연히 선배가 건네준 전화를 받게 된다. 누군가 자신과 딸아이를 해치려 한다는 젊은 여성은 정세라 앵커에게 난데없는 말을 던진다. “제 죽음이 정세라 앵커의 입을 통해 보도되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전화 속의 여성은 자신을 조여오는 죽음의 위협을 직접 취재해주길 원한다. 자신의 꿈이 바로 정세라 앵커라고 말하는 여성의 말에도 장난 전화일 것이라며 전화를 끊은 정세라지만, 뭔가 찜찜하다. 퇴근 이후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 이소정(이혜정)은 정세라가 외면하지 못하는 말을 뇌리에 꽂는다. “이거 너에게 기회야, 진짜 앵커가 될 기회. 언제까지 앵무새처럼 따라 읽기만 할 거야?” 이 말에 직접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정세라는 취재를 위해 직접 반지하 방을 방문한다.


▲ 영화 <앵커> 스틸컷


왜 정세라는 현장에 갈 수밖에 없을까? 간판 앵커로 더는 그 자리에 도전할만한 경쟁자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난데없이 꼭 집어 날아든 전화 한 통화와 엄마의 말은 정세라의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말았다. 현장 취재 없이 완성된 원고를 진행만 한다고 생각해서 형성된 콤플렉스다. 직접 자신이 취재한 뉴스를 진행하는 것, 그것이 완벽한 앵커라고 생각하는 정세라는 더 욕심을 내는 바람에 결국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입지까지도 스스로 무너뜨리게 된다. 여기에서 욕심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반드시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앵커의 역할과 기능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앵커의 역할에 관해서 정립돼 있지 않지만, 단지 자신을 돋보이는 것보다 사안의 맥락과 방향, 통찰력을 잡아나갈 수 있으면 족할 것이다. 오히려 현장 취재에서 지엽적인 ‘사실’이라는 나무들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앵커는 숲을 잡아나가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면 충분하다. 오히려 현장에 있어야 할 사람을 독려하는 것이 더욱 앵커의 역할일 수 있다.


▲ 영화 <앵커> 스틸컷


정세라가 현장 취재를 통해 얻은 것은 자신의 앞날에 방해가 되는 딸아이를 죽이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원생 엄마의 비극적 현실이었다. 그 비극적 현실은 남의 것이 아니었다. 정세라와 엄마 이소정(이혜영 役)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콤플렉스의 모순이 내적 중증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상황을 악화시킨다. 옛날 신문 스크랩 자료를 통해 엄마 이소정이 성공 가도를 달리던 YBC 아나운서였지만 정세라를 미혼 상황에서 임신해 회사를 그만두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더구나 아이를 원망했던 엄마는 정세라와 동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너 때문에 내 꿈이 망가졌다.” 너만 없었으면 9시 앵커 자리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엄마 이소정의 생각은 결국, 엄마 이소정을 지독한 잔소리를 쏟아내며 딸에 대한 집착증 환자처럼 만들었다. 엄마 이소정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정세라를 성공시켜야 했던 것이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이 괴리될 때 프로이트 관점의 노이로제와 신경증이 발생하는 법이다. 이런 엄마의 압박으로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정세라는 결국 해리성 인격장애와 조현병의 양상을 동시에 겪게 된다. 자신과 엄마를 구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의 앵커 자리를 차지하게 된 후배 서승아를 찌르게 된다. 물론 관객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감독은 연출했고, 영화의 종반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밝혀지고 만다.


▲ 영화 <앵커> 스틸컷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세라와 이소정의 불행한 비극의 스토리가 아니다. 이 영화도 그렇지만 많은 드라마에서 여성 앵커 자리를 두고 경쟁에 공포 그리고 불안이 병적으로 교차하는 일이 빈번한 점이다. 왜 이런 것일까? 남자 앵커는 보통 변동이 없지만, 여성 앵커들은 그들의 능력과 관계없이 다른 요인으로 변동의 폭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엄마 이소정으로 돌아가 보자. 애초에 미혼의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회사를 그만두게 하는 방송사의 만행은 정상적일 수 없다. 만약 엄마 이소정이 미혼모라는 이유로 강퇴당하지 않았다면, 정세라와 동반 자살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정세라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앵커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앵커는 우승 트로피도 아니고 성공의 징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는 어떤 누군가의 것이 아니고 공공적 가치를 지닐 뿐이다.


▲ 영화 <앵커> 스틸컷


공영방송과 그에 따른 저널리즘은 스타가 아니라 공공재에 따른 기능과 역할에 있다. 특정 개인 저널리스트를 맹종하거나 절대적으로 우상, 영웅화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적 앵커의 역할에 맞게 수행을 하면 충분하지만, 다른 의도를 개입시키려는 욕망이 더 크게 작동한다면 그 최종 결과는 편파와 왜곡의 수렁이다.

요컨대 여성 앵커 소재의 드라마나 영화는 앵커 자리를 두고 싸움을 시키는 구조적인 시스템 운영을 간과한다. 예컨대 여성 앵커의 비율은 결핍이다. 앵커 자리에 있어도 나이가 좀 들어가면 언제든 교체하고 남성 앵커들은 나이가 있을수록 오히려 선호되는 균등하지 않은 구조는 아직도 여전하다. 적은 자리를 두고 여성 저널리스트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그러한 구조의 개선이 현재 앵커의 취재력 유무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더는 아이를 원망하게 하는 사회와 공동체는 미래가 없다. 정세라가 엄마가 임신했기 때문에 해고를 강요하는 방송사 의사 결정자들에게 더 분노해야 했던 이유이다. 자신을 미워했던 엄마의 젊은 날에만 집착할수록 결국 그 부메랑이 자신에게 좋지 않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으니 그것이 비극이다. 역시 나무보다 숲을 하늘의 독수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역량은 아무에게나 있지 않기는 하다. 이 역시 너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만약 현실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다만, 미혼모 임신은 하나의 메타포일 수 있다. 저널리즘 행위가 아닌 이유로 떠나야 하는 현실을 내포할 뿐이다.


▲ 영화 <앵커>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