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INSIDE

[M 스토리] 살인사건도 받아 써?!
2020-05-11

브레슬라우의 처형 (감독: 패트릭 베가, 출연: 말고르자타 코즈호브스카, 다리아 비다프스카)

‘브레슬라우의 처형’은 1741년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실레지아를 점령하고 그곳의 주요 거점인 브로츠와프를 대도시로 만들 계획을 세울 당시 만들어진 전설이다. 브로츠와프는 당시 독일 접경 지역으로서 오데르 강 연안에 있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도시를 건설하기 전에 (유럽 중세 말기라면) 그 언제나처럼 정화(淨化)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향후 6일간 범죄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한다. 이른바 처형 주간의 실시다. 월요일부터 한 명 한 명씩 거리로 끌려 나와 공개 살해당한다. 약탈자, 타락한 자, 부패한 자 등등.


그 브로츠와프가 지금 폴란드의 브레슬라우다. 2018년에 이 브레슬라우에서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한 남자가 소 가죽 속에서 질식해서 발견되지 않나, 어떤 남자는 거열형(두 팔과 두 다리를 각각 매단 말을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어 죽이게 하는 형벌. 이에 비해 능지처참형은 이미 사람을 처형한 후 말과 소를 이용하여 사지를 찢어 공개하는 형벌이다)을 당해 죽게 된다. 영화 ‘브레슬라우의 처형’이 시작되면서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주인공 형사 헬레나(말고르자타 코즈호브스카)는 누군가를 잃은 슬픔과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 충동과 함께 우울증을 앓으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특정의 누군가를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악독한 마음을 담고 살고 있는 것은 그녀라고 다르지 않다. 머리는 불안정하게 한쪽만 커트를 하고 한 쪽은 늘어뜨린 채 늘 음울하게 대화를 씹어 뱉는데다 상사고 직속 검사고 간에 안중에 없이 오직 자신만의 노련한 수사 감각만을 믿은 채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사건 중반쯤 본청에서 프로파일러인 마그다(다리아 비다프스카)가 개입하면서 이들의 사건에 ‘처형 주간’이라는 역사 콘셉트가 도입되고 이로 인해 수사는 활기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범인도 코앞으로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건의 방향은 아주 엉뚱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제 경찰청 내부에 살해 당한 시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폴란드 영화여서 미안하지만)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폴란드의 93분 작품 ‘브레슬라우의 처형’은 다소 어설픈 작품이다. 데이빗 핀처가 1995년에 만든 희대의 미스터리 걸작 ‘세븐’을 얼기설기 가져온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살인자가 시체에 표식을 남겨 두는 것이 일단 똑같다. 근데 그 콘셉트가 똑같으면 이런 류의 영화는 모두 같아 보인다. 그래서 감독은 차별화를 위해 두 명의 남자 캐릭터를 두 명의 여자 캐릭터 형사로 바꾼 듯이 보이고 특히 그 둘이 내면적으로 어떻게 연결 지어져 있는지에 대한 설정을 새롭게 박아 놓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뒤의 형사가 앞의 형사에게 극 후반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찍은 거야.” 여기서 모든 실마리가 풀린다.

상황 전개는 사실 ‘세븐’보다 더욱 잔혹하다. 공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공분이 스크린 밖으로 잘 전달이 안된다는 특성이 이 영화에는 담겨 있다. 영화가 뭐가 잘 안 풀렸다는 것인데, 살인자가 너무 정상이어서인 듯한 느낌이 든다. 그토록 사회로부터 폭력과 린치, 희생을 당했고 그래서 그 복수를 감행하려 했다면 시체만 난도질할 것이 아니라 본인의 정신세계도 난도질 해놨어야 극적 대구(對句)가 어울릴 것 같았다. 범인이 정상과 비정상을 오갈 수 있는 지적인 인물이 아니라 공포스러운 광인이어야 얘기가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원래 사건을 맡았던 형사 헬레나는 결국 그 범인에 동조하게 된 건지(스톡홀름 신드롬인지) 그렇지 않은 건지, 좀 불분명하다. 이 모든 모호함과 애매함의 분위기는 지금의 폴란드 사회가 여러모로 불분명한 것이 많아서일까, 그런 점을 대변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YTN 같은 뉴스 채널 방송의 여기자와 카메라 기자가 움직인다. 그녀는 종종 ‘뻗치기’를 하는데 그 이유가 사건 담당 검사로부터 사건 전말을 브리핑 받기 위해서다. 사건은 그렇게 노출돼서는 안 되는 데도 검사는 사건을 자기 위주로 가져 가게 하기 위해서, 혹은 스타가 되고 싶다는 공명심에서, 카메라 앞에 서서 주저리주저리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 그 여기자는 한 톨의 글자도 다름이 없이 그걸 그대로 방송으로 내보낸다. 일명, 받아쓰기다. 당연히 사건 해결은 산으로 간다.


여기나 거기나, 거기나 여기나. 취재의 관행은 매한가지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저것도 꼴 보기가 싫은데 실제 현실에서도 계속해서 검찰 발 기사에 대한 받아쓰기가 계속된다면 어떻겠는가. 영화 한 편, 영화 한 장면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무궁무진 한 셈이다.


‘브레슬라우의 처형’은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는 아니다. 다소 킬링타임 용이다. 이런 영화들에도 반면교사를 할 만한 장면들이 들어 있다. 영화를 보는 맛이란 그런 걸 찾아내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영화 평론가 오동진 (YTN 기자 출신,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레지스탕스영화제 집행위원장, BIFF 아시아필름마켓 공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