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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스토리] “기사는 넘겼죠. 위에서 다 막았죠.”
2020-11-03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2020년 10월 개봉 / 이종필 감독, 고아성· 이솜· 박혜수 주연)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올해 본, 가장 유쾌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여성 세 명이 유니폼을 입은 모습 마냥 극 전체의 분위기가 귀엽고 발랄하다. 하지만 내용은 그다지 간단치는 않다. 사실은 암울한 얘기이며 이 사회에 여전히 고칠 게 아주 많다는 얘기를 우회적으로 하고 있는 얘기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95년, 지금부터 25년 전 얘기다.

여성 셋, 자영(고아성)과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삼진그룹에 다니는 여사원이다. 말이 사원이지 사실은 사환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친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엔, (사실은 지금까지도 상당 부분) 대기업에서는 고졸 사원들을 차별했다. 이들에게 커피를 타게 하고, 복사를 하게 했으며, 심지어 담배 심부름까지 시켰다. 자영과 유나, 보람도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이들 셋 모두, 이들 없이는 부서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업무 감각이 대졸 사원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보람은 특히 고등학교 때 수학 천재 소리를 들었을 만큼 회계 관리에 능하다. 삼진그룹 총무회계부는 그녀에게 간부들이 룸살롱 간 것, 개인 비용들을 업무비로 처리하게 하는 등 일종의 ‘분식(扮飾) 회계’를 맡긴다. 유나는 홍보부에서 일을 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아이디어와 촉이 좋다. 그녀는 부서의 여성 대리에게 심한 견제를 받는다. 자영은 자영대로 생산관리부에서는 없어선 안될 친구다.

이 여성 친구 셋은 회사의 부당한 대우를 꾹꾹 참아 가며 토익반에서 열심히 공부한다. 상고 출신이 대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토익 점수 600점을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다 환상이다. 사원 복지라는 명목으로 노조 활동을 못 하게 하려는 대기업의 사기행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여사원들은 토익반에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 1995년에는 다 그랬다. 아니, 앞에 언급한 얘기들은, 지금도 상당 부분 많이 그렇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몇 가지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중층적 모순, 차별의식에 대해 즐비하게 나열한다. 학력 차별, 성 차별, 계급 차별이 이 세 명의 여성에게 동시에 꽂히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차별은 단계별로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한꺼번에 진행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힘든 것이다. 그리하여 모순이 격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은 이상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기 마련인데,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삼진그룹의 자영과 유나 그리고 보람에게도 사건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찾아 온다. 자영은 어느 날, 사실은 후배이지만 직급상 상사인 관계로 회사 선배가 돼 버린 남자 대리 최동수(조현철)와 진상을 부리는 상무 오태영(백현진)의 이전 사무실로 그의 짐을 찾으러 간다. 그러다 자영은 계열사 공장 주변에서 물고기가 떼죽음한 것을 발견하게 되고 곧 엄청난 양의 폐수가 방류되는 걸 목격한다. 페놀이다.

이때부터 영화의 사건은 속도감 있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하급 여사원이 밝히려 하는 불법 환경오염물의 사태, 그것을 은폐하려는 대기업 회사 조직, 그 과정에서 해고와 정직의 위협이 이어지고 우리의 여성 전사 세명은 일대 큰 위기에 봉착한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1995년의 상황을 은근슬쩍 빗대면서 2020년 현재에 대해 얘기한다.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차별적 상황이라는 것이, 결국은 ‘족벌=재벌’의 대기업 체제에서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직장 내 성차별은 많은 부분 완화됐다고 하지만 성희롱이나 성추행 심지어 성폭력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연상케 한다. 매우 가까운 과거를 통해 현재 우리가 어디쯤 놓여 있으며 그토록 외쳤던 사회개혁, 사회진화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올바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야기가 쉽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논거가 쏙쏙 들어온다. 그 점이야말로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의 가장 좋은 점이다. 대중영화는 이런 면이 강해야 한다.


1995년의 시대를 재현하는 것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를 그려내는 것보다 사실 더 어려운 일이다. 후자는 약간의 상상이 덧입혀진다 한들 그걸 그리 심각하게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1995년은 우리가 겪어 왔고, 심지어 아직도 그때의 물건을 지니고 있을 정도의 시대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1990년대에 대한 고증과 디테일이 뛰어 나다. 예컨대 자영이 유나, 보람과 헤어지는 지하철 씬에서 그녀의 뒤에 걸린 지하철 전도가 4호선까지만 그려져 있는 식이다. 그때는 서울 지하철이 9호선까지 멀었던 시절이다. 컴퓨터, 프린트기, 복사기, 전화기 등등의 소품들도 엄밀하게 골라냈다. 그 정성이 귀엽다.


무엇보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은 희망적이어서 좋다. 선이 악을 이긴다. 이길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이긴다. 어쩌면 1995년엔 정말 그랬었던가, 싶을 정도다. 그랬던 사회가 25년이 지나면서 오히려 점점 더 악이 선을 이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되새김질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건 복구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고 영화는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언론의 모습이다. 그게 앞서 얘기한 대로, 선이 악을 이기는 게 아니라, 악이 선을 이기는 단초와 발단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셋은 모든 백 데이터를 가지고 용감하게 언론사를 찾아간다. 페놀 유출 사태를 회사가 어떻게 은폐했는지 그 자료를 전부 제공한다. 그러나 그렇게나 믿었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담당 기자는 전화로 이들 셋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사 다 넘겼죠. 위에서 다 막았죠. 하여간 대기업 놈들 용의주도해.


그런데 정작 기사는 회사의 주도 하에 방송에서 대서특필로 터지기 시작한다. 회사 CEO 빌리 박(데이비 맥기니스)의 빅 픽쳐 전략으로 회사 주가를 떨어뜨리려는 작전에 이용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언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해'라는 것이 이 영화가 전해주는 언론의 모습이다. 그러니 언론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좋아진 게 없다는 것이다. 영화의 눈에,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눈에,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의 눈에, 신문과 방송, 언론은 저렇게 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본주의 언론이 지닌 속성이자 숙명으로만 치부할 것인가. 작은 상업영화 한편으로도 대오각성할 일이자 주제이다.


영화 속 보람의 상사인 봉 부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봉 부장을 연기한 배우 김종수의 연기도 일품이다.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에 남는다. 세상은 몇 안 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한 줌의 깨어있는 자들이 고치고 치유해 낸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삼진그룹 토익 영어반'이 소곤소곤 묻고 있는 질문이다.


당신은 과연,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영화 평론가 오동진 (YTN 기자 출신,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BIFF 아시아필름마켓 공동위원장, 레지스탕스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