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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스토리] 진실은 과연 한 종류일까?
2021-02-05

영화 ‘미스터 존스’(Mr. Jones) (2021년 1월 국내 개봉,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주연 제임스 노턴, 바네사 커비)

폴란드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영화들은 솔직히 매우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녀의 작품은 현실 세계와 많이 닮아 있어 극적 재미를 추구하는 리듬감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호흡이 느리고, 불규칙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최신작인 넷플릭스 폴란드 드라마 [1983]은 그래서 보기가 쉽지가 않다.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작품은, 정치적 선언은 뜨거운데 냉철하지가 않다는 게 다소 맹점이다. 역사의 사건들은 굉장히 입체적이고 복잡한 맥락의 산물인데, 그녀는 의도적으로 평면화 시킨다.


지난달 국내에 개봉된 [미스터 존스]도 그런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데 사실 그래야지만 대중들을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의 정치적 모토와 목표(goal)에 쉽게 다가서게 할 수 있게 하는 측면이 있다.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미스터 존스]를 통해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스탈린 독재 정치의 만행을 고발하려 한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영화의 동력은 두 가지의 역사적 트라우마다. 하나는 나치의 만행과 또 하나는 스탈린 시대가 지녔던 이념의 허구와 위선 의식이다. 앞의 것은 홀로코스트(holocaust, 인종대학살)란 이름으로, 뒤의 것은 홀로도모르(holodomor, 대기근 학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미스터 존스]는 1931~1932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대기근 사태를 다룬다. 아니 대기근 사태를 다루는 기자 가렛 존스(제임스 노튼)의 얘기를 다룬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태로 인민 5백만~1천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더 끔찍한 것은 굶주림을 참다못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는 식인(食人)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엄마가 아이들 중 한 명을 죽여 그 아이를 다른 아이에게 먹이는 일이 발생했을 만큼 우크라이나 기근 사태는 反 인간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사태가 스탈린 치하 사회주의 정책의 심각한 오류로 빚어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크게는 스탈린식 일국 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 노선과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가 충돌한 것인 바, 농산물 수출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의 물적 기초를 마련하려 했던 스탈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다. 하나는 그것을 주변 위성 국가에 대한 식민적 수탈 행위로 실현하려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위해 사회주의 계획 경제라는 미명하에 대규모 농장에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키고 강제 노역을 시키는 등 강압적이고 독재적인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사태는 천재(天災)가 아니라 완벽한 인재(人災)로 그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는 바로 ‘책임’을 부각시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가 두 정치노선의 차이, 이념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그 비인간성에 대해 좀 더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영화 속에서(다소 뜬금없이 등장하는) 조지 오웰(조셉 마윌)은 몽상적 사회주의자답게 주인공인 존스에게 더 평등한 사회는 존재해요. 완벽하지 않을 뿐이죠. 기대를 너무 하면 안 돼요. 실험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누군가는 제대로 된 맥락에서 봐야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은 이후 소련식 사회주의에 실망해 스탈린 독재를 비판하는 우화소설 [동물농장]을 쓴다. 조지 오웰의 그 복잡한 마음을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제대로 된 맥락’으로 살폈어야 했다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책이 아닌 영화가 해야 할 일이다. 인류의 역사는 단문의 건조체가 아니라 복문의 만연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란드는 리얼리즘 영화 기법에 충실하려는 듯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영화의 이야기를 구성했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킨다.

영화의 한 축은 저널리즘에 대한 얘기이다. 자칭 프리랜서 기자라고 하는 가렛 존스는 우연하게 히틀러를 인터뷰한 것으로 젊은 나이임에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만난 베를린 출신 사회주의자 여기자 에이다(바네사 커비)에게 ‘진실은 단 한 종류일 뿐이며 저널리즘은 가장 숭고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스트는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렛 존스 기자는 우파 지식인이다. 우파 기자는 진실을 좇는다. 에이다 같은 좌파 기자는 그 진실이 누구를 위한 것인 가를 파헤친다. 둘은 같은 척 다르고, 다른 척 매우 같다. 영화 [미스터 존스]와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바로 그 간극의 계곡을 파고들었어야 옳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탈북자들이 휴전선 인근에서 북한 주민을 향해 전단 살포 행위를 한다. 언론 자유를 위해서는 막아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DMZ 인근 주민들의 삶을 매우 불편하게 하고 남북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현 정부는 전단 살포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했고 미국의 새 대통령 조 바이든 행정부의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부차관보 정 박은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진실은 무엇인가. 기자는 어떤 진실을 좇아야 하는 것인가. 진실은 과연 한 종류일 뿐인가.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종종 역사와 정치 어젠다를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미스터 존스]는 우크라이나의 끔찍한 비극을 되새기게 해 주지만 그것을 언론이 어떻게 역사에 전해야 하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참으로 한국의 언론 상황만큼 고민스러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일람(一覽)을 권하는 바이다.


영화 평론가 오동진 (YTN 기자 출신,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BIFF 아시아필름마켓 공동위원장, 레지스탕스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