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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토리] 기자가 슈퍼 히어로의 연인이었던 시절
2021-07-12

영화 '슈퍼맨' (감독 : 리처드 도너, 출연 : 크리스토퍼 리브, 마곳 키더 등)

영화 '배트맨' (감독 : 팀 버튼, 출연 : 마이클 키튼, 잭 니콜슨, 킴 베이싱어 등)


돌이켜 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79년에는 광화문 사거리, 지금의 동화면세점 건물 자리에 국제극장이 있었던 시대다. 그해 불후의 명작(꼭 ‘명작’이라고 표기하긴 어렵지만) <슈퍼맨>이 개봉됐다. 그때만 해도 영화 간판을 극장 화가들이 그리던 터였다. 슈퍼맨(영어 발음의 정확한 표기인 ‘수퍼맨’이 아니라 한글의 맞춤법은 ‘슈퍼맨’이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우주를 날아다니는 장면이 페인트 물감으로 그려져 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구름 떼 비슷하게 몰렸던 거 같다.

- 영화 '슈퍼맨' 포스터 -

영화의 주요 관계자들이 지금은 다 고인이 됐다. 슈퍼맨 역할을 했던 크리스토퍼 리브는 말에서 낙상해 전신마비로 살아가다가 2004년에 타계했다. 슈퍼맨의 연인 로이스 레인 역으로 나왔던 마곳 키더는 오랫동안 정신질환과 약물중독에 시달리다 2018년에 사망했다. 위대한 배우이자 슈퍼맨의 아버지로 나왔던 말론 브란도는 오랜 추문 끝에 2004년에 영면했다. 영화에서 악당으로 나왔던 넷비티만 비교적 장수했다. 그는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다가 올해 사망했다. 리처드 도너 감독도 비슷하다. <오멘>과 <리쎌웨폰> 시리즈 등을 만든, 할리우드의 이 명장 감독 역시 수많은 영화를, 무엇보다 끝까지 만들다 지난 7월 세상을 떠났다.

왜 갑자기 슈퍼맨 얘기일까? 솔직히 이 글을 쓰기 위해 밤새 끙끙댔다. 기자를 소재로 한 영화가 이제는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기자들을 ‘허접 쓰레기’처럼 그려 대기 십상이어서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는데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옆에는 늘 기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슈퍼맨은 수트를 입고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며 인류를 구하는 일 말고도 땅에서의 생활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땅에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때의 이름이 바로 클락 켄트이다. 클락의 직업은 다름 아닌 신문사 사진기자이다.

- 영화 '슈퍼맨' 스틸컷 슈퍼맨/클락 켄트(크리스토퍼 리브), 로이스 레인(마곳 키더) -

근데 이게 참 편리한 게 클락을 기자로 설정해 놓고 보니 그는 늘 사건 현장에 가깝게 있게 되고(물론 슈퍼맨은 천 리 밖 소리도 듣고 감지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다. 이 얘기는 곧 그가 늘 정의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환상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는 기자가 그런 가치 있는 직업군으로 분류됐던 시절이다. 정의의 사도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갖는 비현실성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슈퍼맨>은 이후에도 현대판 버전으로 계속해서 만들어졌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맨 오브 스틸>에서는 슈퍼맨 자신(헨리 카빌)보다는 그의 연인 로이스 레인(에이미 아담스)이 신문기자로서 더 큰 활약을 펼친다. 기자는 사랑도 참 열정적으로 한다. 무엇보다 그 사랑은 희생적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에서는 로이스 레인, 곧 기자를 구하기 위해 슈퍼맨은 전력을 다 한다. 기자가 영화에서처럼 소중했던 시절, 다 지나간 얘기일 뿐이다.

- 영화 '배트맨' 스틸컷 배트맨/브루스 웨인(마이클 키튼) -


사람들이 좋아하는 배트맨도 시리즈 첫 회분에 해당하는 팀 버튼 감독의 1990년작 <배트맨>에서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마이클 키튼)의 미스터리한 생활을 쫓는 사람, 바로 여기자 빅키 베일(킴 베이싱어)이다. 이 여기자는 주인공인 슈퍼 히어로와 사랑에 빠진다. 배트맨 역시 기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할리우드의 영화든 우리의 영화든 그렇게, 기자를 영웅의 근접 거리에 놓음으로써 영웅과 등가로 대우하거나 아니면 영웅 그 자체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기자와 언론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인식했다는 증좌다. 신뢰도가 높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이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 영화 '배트맨' 스틸컷 배트맨/브루스 웨인(마이클 키튼), 빅키 베일(킴 베이싱어) -

한편으로는 이렇게 기자가 주요 캐릭터로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적, 다시 말해 낭만적 직업군으로 취급됐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제발, 그런 낭만만이라도 좀 되찾았으면 좋겠다. 위대하거나 정의롭지 않아도 될 터이다. 그건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슈퍼 히어로와 정담을 나누고 밀어를 나눌 만큼의 수준과 교양만이라도 되찾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리 큰 바람이지만은 아니지 않은가?


영화 평론가 오동진 (YTN 기자 출신,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BIFF 아시아필름마켓 공동위원장, 라이브 더빙쇼 <이국정원>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