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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토리] 영화가 언론이 되고 언론이 영화가 되는 세상
2021-11-17

영화 '그림자꽃' (감독 : 이승준),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맷 데이먼, 애덤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등)

▲ 영화 <그림자꽃> 포스터(좌),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포스터(우)


언론, 기자는 늘 새로운 선택을 할 수가 있다. 그건 영화를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최근에 개봉된 일련의 영화들을 보면서 언론의 (고루하기 짝이 없는) 사명이라고 하는 것도 되새길 수가 있다. 아니면 언론이라고 하는 게 원래부터 당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어떤 후배는 “언론사 지배구조 자체가 사회나 사람, 조직 내부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 당신처럼 언론을 비판하고 싶으면 언론사를 새로 만들어라.”라고 일갈한다. 어떤 면에선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냥 남들 노는 거, 혹은 남들 즐기는 거나 잘 챙겨주면 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승준 감독이 만든 필살의 다큐멘터리 <그림자 꽃> 같은 작품을 보면 ‘기자가 뭔가 해야 한다, 이렇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않을까?’라는 자각을 부여한다. <그림자 꽃>은 탈북자 아닌 탈북자 김련희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일종의 밀입국을 한 김련희는 남한 당국의 통제 속에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게 2011년부터의 일이다. 매우 복잡한 남북관계의 해법, 인권 문제, 외교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간주의에 기초해서 봐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그걸 수행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 직업군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바로 기자이자 언론이다.


<그림자 꽃>은 남북한 문제를 취급하는 데 있어 언론이 얼마나 ‘인간 김련희 문제’를 방기해 왔는지,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게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렇게 종종 저널의 역할을 대신한다. 근데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저널의 역할은 저널이 해야 하며 그래서 그 위용담을 영화가 영화로 만들게 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예컨대 워싱턴포스트지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 <더 포스트> 같은 작품이 그랬다. 이제는 이런 영화가 나오지를 않는다. 저널의 위용 같은 게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도 트럼프 시대를 겪으면서 그런 분위기가 더 커졌다. 어쩌면 우리도 곧 더 그렇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영화 <그림자꽃> 스틸컷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도 작금의 미투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법정 공방들에 대해 언론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깊이 깨닫게 해 준다. 이 영화는 중세, 그러니까 1380년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벌어진 한 귀족 부인의 성폭행 사건을 다룬다. 장 르 카르주라는 이름의 기사, 봉신(封臣)이 있었고 그의 부인이 마르그리트였는데 카르주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자크 르그리가 이 여자를 강간하면서 벌어진 소송사건, 그리고 이를 생사를 건 남자들 간의 결투로 해결하는 이야기다. 프랑스 국왕은 카르주와 르그리가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여 각각 자신들이 주장하는 고발과 결백을 증명하라고 명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그리트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 곧 목숨과 명예, 인간의 존엄성을 걸고 자크 르그리를 고발한다.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여성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이다. 중세나 지금이나 남성들의 폭력적 시선은 그리 변한 게 없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는 그런 시선을 통째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한다. 세상이, 남성적 시선이, 정말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발자로서의 마르그리트이다. 그녀는 진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공중(公衆) 앞에 나서는 용기를 실현한다. 이건 정말 음미할 것이 많은 부분이다. 특히 2차 가해, 3차 가해 등등 법리적 공방으로 오히려 진실의 전체가 드러나지 않게 만드는 지금의 세상을 향해 스콧 감독 스스로 자신의 노회한 판단을 개입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리들리 스콧의 그런 역할을 사실은 언론과 저널, 기자들이 해내야 한다. 그것도 줄기차고 끈덕지게.

▲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스틸컷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혹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나가고 있는 많은 작품들 속에는 다양한 세상이 담겨 있다. 영화는 세상의 운행 방식에 대해 늘 불만이 많다. 이것저것 수많은 욕구를 표출한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은 항상 불안하기 마련이다. 영화의 불만과 불안은 당연히, 저널리스트들을 통해 해소돼야 한다. 사람들이 언론에게 바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것일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자가 아니라 해결의 수순을 찾아가는 것. 일종의 해결사 역할 같은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영화와 언론의 구분점이 찾아진다. 영화가 언론이 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언론이 영화가 돼서는 더욱 안될 일이다. 그런데 요즘 점점 그렇게 되어 가는 형국이다. 걱정이 깊어진다.



▶ 영화 평론가 오동진 (YTN 기자 출신,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BIFF 아시아필름마켓 공동위원장, 라이브 더빙쇼 <이국정원>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