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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 산책] 대나무숲의 바람 소리를 '드리핑'하는 화가 정수경
2020-08-21

“드리핑은 물감과 캔버스가 만날 때  물감의 양과 밀도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시각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_ 정수경 작가

청음, 193.9x130.3, Acrylic on canvas, 2020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셨는지요? 장면 장면 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멜랑콜리한 아코디언의 멜로디가 화면을 어루만지듯 감미롭게 흐르는 영화 속에서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닌 ‘위안’과 ‘치유’, ‘사랑’과 ‘이별’의 감정들을 절절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지방 방송국의 PD이자 아나운서인 은수(이영애)와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가 만나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나무 숲’이었지요. 그 곳에서 그 둘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저 바람 소리와 숲 향에 취해 있을 뿐이었지만 시나브로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첫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작가도 <봄날은 간다>를 보았던 것일까요? 매화를 그리기 위해 찾아갔던 광양에서 흐드러진 매화향에 취해 있던 정수경은 우연히 대나무 숲을 발견하고 무작정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숲 속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와 햇살을 머금은 그늘은 단박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후로 대나무 숲은 캔버스라는 ‘공간’을 빼곡히 채우는 정수경의 ‘페르소나’가 되어주었습니다.    

▼다음은 정수경 작가와의 일문일답


Q. 그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와 성장 환경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산을 끼고 살아야 명을 늘릴 수 있다는 말에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항상 산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았어요. 산은 저에게 좋은 놀이터 또는 피난처이기도 했고, 닿을 수 없던 먼 곳을 바라볼 수도 있는 아주 높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자연, 그 중에서도 특히 나무를 소재로 삼는 것은 아마도 이런 어린시적의 시각적 기억들 때문인 것 같아요. 갈등이 많았던 어린 시절에는 제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은 같이 걸어가는 동반자입니다. 작업은 제가 삶과 세상을 보다 통찰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자 끝없는 고뇌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정말 멋지고 잔인한 동반자인 셈이지요.

Q. 드리핑을 통해 나타난 결과물은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연에 의한 결과인 것인지?


-드리핑은 우연과 필연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제게 매우 흥미로운 표현방법입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 보다는 상대적인 경우가 많지요. 드리핑은 이런 면에서 비슷한 속성을 지닙니다. 또한, 행위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표현 영역이 확대된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작품의 시작점, 에스키스 단계에서는 의도가 강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의도’보다는 ‘우연’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지요. 우연적인 요소는 종종 작품진행을 어렵게도 하나 작품에 최종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는 요소로 귀결됩니다. 결국, 의도냐 우연이냐의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드리핑의 결과가 원하는 의도대로 나오지 않을 때도 있을텐데..


-드리핑의 매력은 의도가 전부를 만들 수 없음에 있습니다. 이런 경우 결과물에 대해 억지로 틀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 왜 그런지를 이해하고 다시 즐길 수 있는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다음 작업에서 해결하면 되니까요.

Q. 숲 그림에서 나무와 그늘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타이틀을 왜 ‘청음’으로 지었는지? 


-삶의 그늘은 분명히 어렵고 힘들죠. 하지만 그늘은 삶을 좀 더 성찰할 수 있게 만들어 주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마치 뜨거운 햇살을 등지고 생긴 나무 그늘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드리핑은 물감과 캔버스가 만날 때  물감의 양과 밀도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시각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 푸른 소리가 바로 ‘청음’이구요.

Q.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고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제 작업은 빈 화폭을 시각적으로 채우는 것이지만, 사실은 삶의 어떤 시점, 세상의 어떤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과 이런저런 생각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꾸준한 작업으로 작품을 보는 이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나눌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삶과 작품이 괴리감 없이 함께한 작가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