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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토리] 진실을 부각하는 그들만의 저널리즘
2022-03-03

■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 '프랑스(FRANCE)' / 2021

감독 : 브루노 뒤몽, 출연 : 레아 세이두, 블랑쉬 가르딘, 벤자민 비올레이

▲ 영화 <프랑스> 포스터


놀랍게도 TV 앵커가 전투 현장에 리포터로 나선다.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있어도 족할 듯싶은데 말이다. 앵커가 현장에 출동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고 꼭 할 의무도 없으니 이러한 보도를 접하는 시청자들은 매우 열광할 수 있다.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뿐더러 앵커의 참여가 신뢰성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앵커를 접하는 시청자들은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주인공 프랑스 드 뫼르(레아 세이두)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뉴스 앵커다.

▲ 영화 <프랑스> 스틸컷


그런데 전장에 나간 프랑스의 모습은 좀 이상하다. 분명 총탄이 파고들고 포탄이 떨어지는 현장은 맞지만 웃음이 흐르는 분위기가 묘하다. 병사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지시하고 이에 맞춰 동작을 취하고 대사까지도 즉석에서 만들어준다. 홍상수 감독이 울고 갈 듯 현장 즉흥성이 탁월할 정도다. 저널리스트라기보다는 디렉터 같지만, 감독처​럼 연출은 해도 기만​은 하지 않는다. 그 디렉팅에서 대단한 건 폭발 현장 속에서도 자신의 프로그램을 위해서 열정을 뿜어낸다는 점이다. 심지어 바다로 나가 난민의 보트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보트에 같이 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호화 보트를 옆에 대동하고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만 승선한다. 만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현장에 프랑스가 총탄이 오가는 생생한 장면을 전한다면 정말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듯싶다. 아울러 그들이 다른 나라로 수백만 피난민이 되어 흩어져 가는 현장에서 생사고락을 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그 장면들은 조작과 연출이겠지만 말이다.

▲ 영화 <프랑스> 스틸컷


그나마 다행이라면 프랑스 드 뫼르가 기자회견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첫 지명을 받는 정도고 정치인에 입문하지 않은 점이랄까? 대개 영화적 현실은 대중적 인기가 있는 앵커라면 정치권에서 러브콜을 받는 설정이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현실정치에서도 인기 앵커는 곧잘 그런 상황에 놓이곤 한다. 더구나 여성 앵커라면 남성 앵커보다 더욱 그런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성 앵커가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희소성의 역설이다. 그런데 예술 감독들은 대개 이런 유명 앵커를 등장시키면 관습적으로 설정하는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을 펼친다. 그런 흐름에서 정계로 진출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리지 않을 것이다.

▲ 영화 <프랑스> 스틸컷


대신 빈번하게 유명 앵커의 실존적 고민과 방황을 말한다. 유명세를 위해 분투하던 앵커는 결국 무리수를 두게 되고 파멸을 하게 된다는 자칫 도식적인 흐름과 결말로 맺어진다. 프랑스 드 뫼르 역의 레아 세이두는 항상 자아도취의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는 세상의 주목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서는 프랑스는 언제나 사진을 함께 찍고자 하는 셀럽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렇게 셀럽이 되는 스타 앵커가 존립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인지는 알 수가 없다. 더 이상 연출 디렉팅으로 스타 앵커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미 언론이 매체 영향력을 잃은 지 오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영화 <프랑스> 스틸컷


어쨌든 주목을 받는 사람은 결국 그 주목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법. 어느 날 도취와 자만의 일상에서 프랑스 드 뫼르는 스쿠터 아르바이트하던 청년을 자동차로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킨다. 즉시 항상 자신이 다루던 언론 사회면에 등장한다. 온통 그의 사고 소식만이 자극적으로 등장한다. 우울증을 빠진 프랑스는 급기야 방송 은퇴 선언을 하게 되고 도시를 떠나 교외에서 요양하기로 한다. 모처럼 일에서 벗어난 그곳에서 사랑도 다시 시작하기에 이른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여정이 펼쳐지는 듯싶다. 하지만, 그를 주목하는 세상은 그 한적한 눈 덮인 산마을에도 있었다. 알고 보니 사랑에 빠진 상대는 라틴어 교수로 위장한 신문기자였던 것이다. 프랑스는 처절한 모멸감에 휩싸이고 사죄하는 위장 연인에게 분노는 가라앉질 않았다.

▲ 영화 <프랑스> 스틸컷


그러한 고통을 겪은 프랑스는 오히려 다시 방송으로 돌아온다. 왜 그랬을까? 방송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욕망은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여전히 전쟁터를 찾았다. 누군가는 생명을 잃거나 위협받는 현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장면만 찍고 언제든 철수하는 저널리즘 행위를 계속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프랑스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프랑스는 방송을 놓지 않으며 방송도 계속 그를 기용한다. 무슨 이야기를 감독이 풀어 놓으려는지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아쉬운 점은 프랑스의 언론 행위가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이 잘 드러나지 않고 단지 내적 번민과 욕망에 주제 의식의 초점이 맞춰 있다는 것이다.

▲ 영화 <프랑스> 스틸컷


영화보다 현실은 더욱 진실을 위장한, 위험한 세계관이 현실을 왜곡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비록 연출이 아니더라도 놀랍도록 인위적이고 편견에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인위적인 디렉팅보다 더욱더 치명적인 위험을 낳을 수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아랍지역이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지역보다 우크라이나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한 저널리즘의 태도이다. 예를 들어 NBC 뉴스의 켈리 코비엘라 해외특파원은 “우크라이나 국민은 크리스천이고, 백인이고, 그들은 아주 닮았다”고 했다. 프랑스 뉴스채널 BFM TV의 필리페 코르베는 “시리아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차를 타고 떠나는 유럽인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를 위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듯 정의와 공적 가치를 부각했지만, 상대적으로 아랍지역이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지역 등 유럽 밖은 문명화되지 못한 지역으로 규정했다. 이른바 서방 중심주의 저널리즘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논조는 비유럽지역의 전쟁에 대한 다른 태도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덜 문명화 된 지역에는 평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다. 비유럽지역이라고 해도 여전히 생명은 소중하고 전쟁은 일어나서도, 일으켜서도 안 된다. 이렇게 보도 현실은 프랑스 드 뫼르 같이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비언론적인 보도 행위를 넘어 무의식적 편견이 점철된다.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무의식을 다룬 책 <히든 브레인(Hidden Brain)>에서 작가 샹커 베단텀(Shankar Vedantam)은 말한다. 편견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가 무심코 튀어나온다고.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위기 상황에서 더욱 면밀하게 성찰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집단 무의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정한 진실을 부각하며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고 그들만의 저널리즘을 공유하는 행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연출된 저널리즘보다 더욱 위험하다. 자칫 정의를 위한다는 신념에 스스로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