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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스토리] 누가 보냈을까? 밤잠 깨운 편지 한 통 - 김민성 기자
2023-10-20

YTN 보도국 전북취재본부 김민성 기자


[수상기] 누가 보냈을까? 밤잠 깨운 편지 한 통

* 2023년 3분기 '자랑스러운 YTN인상' 특종상 동상

<소방서장 관용차, 업무추진비 사적 유용> 연속 단독보도


그런 날이 있다. 잠이 쏟아져 죽겠는데 어쩐지 침대에는 가기 싫은. 한참을 꾸벅거리다가 고개를 든 건 소파 위 휴대전화 진동 소리 때문이었다. 밤 11시 반에 부재중 전화 7통, 대체 누구냐 싶던 차에 전화가 또 걸려 왔다.


발신자는 자신을 택시 기사라고 소개했다. 손님 부탁으로 전할 게 있다며 대뜸 어디냐고 묻는 사람에게 집 주소를 알려줄 수는 없었다. 대신 근처 관공서에서 보자고 말한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뭘까. 제보일까 해코지일까, 나오라면 나가야 하는 건가, 오만 생각이 들었던 건 아무래도 겁이 나서였던 것 같다.


미리 와서 기다리는 택시를 향해 휴대폰 음성녹음 앱을 켜고 걸어갔다. 기사는 창문을 내린 뒤 대뜸 봉투 하나를 건넸다. 돈은 아닌 거 같다며 쿨하게 떠난 택시. 봉투 안에 든 편지를 몇 번 반복해 읽어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김민성 기자가 받은 제보 편지


당시 현직 진안소방서장의 관용차 비위 내용과 함께 전북소방본부가 고위급 간부의 부적절한 행위를 은폐하려 한다는 주장이 담긴 제보 편지였다. 내용이 꽤 구체적이라 이튿날 곧바로 취재에 나섰다. 자료를 요구하자 전북소방본부는 “얼마 전부터 감찰을 시작한 사안이다. 조사 독립성이 지켜져야 하니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보도를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소방은 거듭 사정했다. “이번만큼은 전북소방본부가 먼저 나서서 간부 비위 척결에 나서는 모양새를 조직 안팎에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앞서 올해 있었던 두 차례의 소방서장급 간부 징계·감찰이 모두 YTN 단독보도로 이뤄진 만큼 소방 입장에선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데스크 논의를 거쳐 우선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결정에도 소방은 관용차 운행일지만 제공할 뿐 관용차 하이패스 이용 내역 등 취재에 필요한 세부 자료를 내놓기를 거부했다. 감찰 중이라는 이유로 정보공개청구에도 응하지 않은 채 보도 예상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캐물었다.


[단독] 관용차, 법인카드까지 개인적으로 사용...소방서장의 만행 (YTN 뉴스화면 캡처)


이에 취재진은 진안소방서장의 2년 치 업무추진비 지출 내역과 관용차 운행일지를 대조하는 우회로를 파고들었다. 또 전라북도의 관용차 이용 조례 등을 검토해 규정 위반 근거를 직접 따져봤다. ‘조사 독립성’을 강조했던 전북소방본부의 진의를 검증하기 위해 감찰 조사 자체로까지 취재 범위를 확대해 감찰관의 이전 근무 부서 등을 체크했다.


의심은 현실로 나타났다. 이런 사정 속에서도 전북소방본부는 감찰 조사에 진안소방서장의 옛 직속 부하 직원들을 투입하는 등 미심쩍은 조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서장 지시로 대신 서류를 꾸며줬던 직원들이 이번엔 감찰관이 된 거다. 소방은 고위직 비위 정황을 본청에 알리지도 않았다. 소방청에서는 취재가 시작되기 전까지 진안소방서장 감찰 자체를 보고받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역시 소방청은 기사로 접하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단독] 관용차, 법인카드까지 개인적으로 사용...소방서장의 만행 (YTN 뉴스화면 캡처)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진안소방서장의 관용차 사적 유용 사실과 업무추진비 업무 외 지출 정황, 마지막으로 전북소방본부 감찰 조사의 문제점 등을 묶어 세 꼭지 연속 보도를 이어갔다.


보도 이후 전북소방본부는 전체 소방정들을 소집했다. 자정결의대회를 열어 청렴서약도 받았다. 감찰 조사 위법성을 지적한 보도가 나온 뒤에는 문제가 된 감찰관을 다시 조사팀에서 배제했다. 자체 조사하던 관용차 사적 유용뿐만 아니라 YTN이 제기한 업무추진비 사적 지출 의혹까지 추가 감찰에 나서야 했다. 이번 취재·보도가 없었다면 소방의 감찰 시스템이 과연 제대로 작동했을지 의문이다.


이후 전라북도 징계위원회는 김 서장에게 중징계인 정직 3개월과 횡령액의 2배에 해당하는 징계부가금을 부과했다. 소방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김 서장의 파면을 재차 촉구하며 관련자들을 경찰에 고발했다. 현재 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단독] 법카·관용차 담당했던 부하가 감찰...조사 위법성 '도마 위' (YTN 뉴스화면 캡처)


그동안 전북취재본부는 전북소방본부 소속 소방정(소방서장급)들의 비위 의혹을 꾸준히 단독 보도해왔다. 부하 직원들을 향해 따지 않은 맥주병을 수차례 던진 A 소방정(지난해 12월 보도), 은퇴를 앞둔 고령의 부하들에게 막말과 폭언을 일삼은 B 소방정(지난 6월 보도) 등 주요 간부들의 비위를 꾸준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최근 1년 동안 전북소방본부 소방정 18명 중 3명이 YTN 보도로 징계를 받았다.


전북소방본부가 이들에 대해 ‘단순 경고’ 등 솜방망이 처분을 내리거나, 조사 과정에서 제보자 신원을 색출하려 한 전례들을 들춘 것도 전북취재본부였다. 이런 조직적 감싸주기에 대한 위험성과 부적절성을 여러 번의 연속 보도로, 때론 <와이파일>이라는 인터넷 글 기사로 짚어왔다.


▲ 부하들에게 맥주병 던진 소방 간부...서장 승진 1년 만에 '갑질' 감찰 (YTN 뉴스화면 캡처)


돌이켜보면 취재가 쉽게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가끔 그 문턱을 넘을 뿐이지만, 그때마다 보통 누군지 모를 내부 고발자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다. 주차된 YTN 취재 차량 백미러에 제보 편지를 끼워뒀던 소방관이 기억난다. 5년도 더 지난 사건의 동영상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다가 취재팀에게 보낸 익명의 소방관도 있었다. 작은 기사의 취재 후기를 이토록 중언부언한 건 이들의 존재를 말하고 싶어서다. 오늘도 가장 앞에서 현장을 누비는 YTN 선후배들이 그러하듯, 전북취재본부 역시 그들이 보내는 믿음에 한결같이 성실하겠다고 다짐한다.



※ 링크 참조

부하들에게 맥주병 던진 소방 간부...서장 승진 1년 만에 '갑질' 감찰 (2022.12)

https://www.ytn.co.kr/_ln/0115_202212131229451704

[와이파일]서장님이 왜 그럴까?...되풀이되는 '소방 갑질' (2023.06)

https://www.ytn.co.kr/_ln/0115_202306200600011796